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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포커스] 제이비안의 꿈

그를 알 수 있게 된 것은 유튜브 알고리즘 덕분이다. 유튜브 영상들 가운데 그에 관한 것이 올라왔고, 그의 이름과 외모가 눈에 들어오는 바람에 클릭까지 하게 됐다. ‘혹시 한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의 이름은 제이비안 이(Xaivian Lee), 프린스턴대학 농구팀 소속이다. 올해 2학년인 그는 팀의 에이스 역할을 하고 있다. 포지션은 포인트 가드. 올 시즌 게임당 평균 17 득점, 어시스트 3.7개, 리바운드 5.7개를 기록했다. 프린스턴대가 속한 아이비리그가 강팀이 많은 곳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뛰어난 성적표다.     프린스턴대는 아쉽게도 올해 ‘3월의 광란(대학농구 토너먼트)’ 무대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시즌 24승5패의 좋은 성적을 기록했지만 리그 토너먼트 결승에서 예일대에 지는 바람에 출전권을 얻지 못했다. 대신 ‘NIT’라는 다른 대회에 참가했지만 아쉽게도 1라운드에서 탈락했다. 이번 시즌 제이비안의 경기 모습을 더는 볼 수 없게 됐다.         캐나다 토론토에서 나고 성장한 제이비안은 엄마가 한인이다. 그는 자신의 인종적 정체성에 대해 ‘50% 코리안’이라고 밝힌다. 프린스턴대 교내 신문인 ‘프린스토니안’에 소개된 그의 별명도 ‘코리안 프라이드 치킨(Korean Fried Chicken)’이다. 어떤 연유로 이런 별명을 갖게 됐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의 정체성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이다.   그의 뒤에는 역시 ‘한인 엄마’가 있다. 토론토 지역에 거주하는 엄마 이은경씨는 시즌 중엔 격주로 아들의 경기장을 찾는다고 한다. 자동차로 편도 9시간이나 걸리는 먼 거리를 운전하고 다닌다. 자녀를 위한 것이라면 힘든 것도, 두려운 것도 없는 전형적인 ‘한인 엄마’의 모습이다. 하루 3가지 일을 하며 아들을 NFL(프로풋볼) 스타로 키워낸 하인즈 워드의 어머니 김영희씨의 열정도 그런 것이었다.       제이비안은 프로농구(NBA) 진출을 꿈꾼다. 그의 침대 옆에 설치된 보드에는 NBA 선수가 되기 위해 매일 해야 할 것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사실 그의 실력은 NBA에 근접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농구 전문가들은 그가 드래프트에 참여할 경우 1라운드는 아니라도  2라운드에서는 지명될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예상한다. 제이비안이 NBA 진출에 성공한다면 한인 이민사에는 또 하나의 기록이 만들어진다. 한인 최초의 NBA 선수가 탄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 NBA에서 잠깐 활약한 한인 선수가 있긴 하지만 그는 한국 출신이었다.     제이비안이 NBA 진출을 바라는 것에는 또 한 가지 이유가 있다. 한인은 물론 아시아계 청소년들의 롤모델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농구는 특히 아시아계에게 진입 장벽이 높은 종목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NBA 진출은 아시아계 청소년들에게 또 하나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건’이 될 수 있다.       그는 ‘네버 투 하이, 네버 투 로우(never too high, never too low)’라는 문구를 좌우명처럼 여긴다고 한다. 이제 스무살이 된 청년치고는 참 의젓하다. 그가 본인의 좌우명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며 자신의 꿈을 향해 전진했으면 좋겠다.       한인 이민 역사가 쌓이면서 2,3세들의 진출 분야도 다양해지고 있다. 그들이 생각하고 활동하는 무대는 1세들의 것보다 훨씬 넓다. 그들은 1세들이 닦아놓은 토대 위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가고 있다. 1세의 잣대로만 그들을 평가하면 무리가 따르는 경우가 많이 생긴다는 의미다.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제이비안처럼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한인 차세대를 발견하는 것은 큰 즐거움이다. 그만큼 한인 사회의 밀도가 충실해지고 있다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김동필 / 논설실장뉴스 포커스 제이비안 프린스턴대학 농구팀 한인 엄마 한인 선수

2024-03-28

[문화산책] 사람은 크게 살아야 한다

“사람은 크게 살아야 한다. 그걸 잊지 마라.”   우현 고유섭 선생이 제자이자 후배인 황수영 박사에게 한 말씀이다. ‘고유섭 평전’을 읽다가 이 구절에서 오래 멈춰서 많은 생각을 했다. “크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 앞에 참 아주 부끄럽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의 삶은 ‘크다’는 말과는 거리가 멀었다. 멀어도 한참 먼 조무래기로만 가까스로 살아왔다. 그러니 부끄럽지 않을 수가 없다.   우현 고유섭(1905-1944) 선생은 개성부립박물관 관장을 역임하며, 한국미술사의 초석을 다진 선구적 학자였다. 그것도 일제강점기라는 어려운 현실에서 “짓밟힌 민족자존을 되찾기 위해 민족미술사를 홀로 개척해나간 선구자”다.   “우현은 가장 비범했고 가장 열정적인 개척자였으며 가장 고독했던 문화독립운동가였다. 그는 민족혼을 지킨 불멸의 혼이다.” 그러니까, 고유섭 선생의 ‘큰 삶’이란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미술사 확립을 통해 민족적 자존심을 되찾으려는 개척자의 삶이었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우리 조선의 예술이 일본보다 우월하다는 걸 증명하고 가야지…. 우리에겐 독창적이며 빛나는 문화예술이 있다.” 그 독창적이며 빛나는 우리의 미술사를 바르게 정리한 책을 쓰는 것이 선생의 꿈이었다. 그 꿈을 위해, 죽는 순간까지 치열하게 글을 쓰셨다.     안타깝게도 우현은 1944년 6월에 39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한국미술사 집필을 완성하지 못했다. 해방을 앞두고 타계했으니, 더욱 안타깝다. 올해가 타계 80주년 되는 해다.   비록 한국미술사를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그가 남긴 학문적 업적은 실로 대단하다. 그 기초를 디딤돌로 삼아 후학들의 연구가 이어져 왔다. 그리고 ‘개성 3인방’이라고 일컬어지는 황수영, 최순우, 진홍섭 같은 훌륭한 미술사학자를 제자로 길러 한국미술사 연구의 기초를 마련한 것도 선생의 큰 업적이다.   황수영 박사는 한국 불교미술사의 최고 석학으로 동국대학교 박물관장과 총장을 역임하며 많은 학문적 업적을 남겼고, 최순우 관장은 국립박물관 관장으로 우리 문화재의 보존과 재조명에 앞장섰다. 진홍섭 박사는 국립박물관 초대 개성분관장과 이화여대 박물관장으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세 분 모두 우현 선생의 학문적 기초 위에서 자기 학문 세계를 펼쳐나갔다.   크게 살기 위해서는 세상을 넓게 보고, 깊게 생각하는 눈과 마음을 가져야 한다. 특히, 역사 공부에서는 긴 안목과 깊은 시각이 반드시 필요하다. 망원경과 현미경을 동시에 갖춰야 하고, 객관성과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우현 선생 말씀대로 역사학자는 큰 사람이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크게 사는 것이 중요하지만, 사람 자체에 크고 작음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간 누구에게나 장점과 단점이 있게 마련이고, 그 장점과 단점을 평균하면 사람의 크기는 대개가 어슷비슷하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아주 특별하게 타고난 사람이 아닌 다음에는 큰 차이가 없다고 믿고 싶다.   불교계에서 영향력이 막강했던 법정 스님은 ‘큰 스님’이라는 말을 들으면 늘 손사래를 치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고 전한다. “큰 스님? 그럼 작은 스님도 있는가? 대추기경이 있고 소추기경이 있고 그런 건가?”   옳으신 말씀이다. 하지만, 우현 선생의 “크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도 절실하다. 큰 사람이 많아야 우리 세상이 아름답고 건강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라도 조금이나마 크게 살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하지만, 참 어려운 일이다. 나는 더 어렵다, 워낙 키가 작아서….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한국미술사 집필 한국미술사 연구 우현 선생

2024-03-28

[열린광장] ‘빈 무덤’, 예수 부활의 현장

이제 부활절이다. ‘부활’은 인류 역사의 최고 정점이다. 누구나 예외 없이 맞이할 수밖에 없는 죽음을 쳐부수고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이다.     이건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 대 사건이다. 바로 기적 그 자체다. 인류 역사에서 이같은 기적이 일어난 적이 언제 또 있었던가.     예수 부활은 그래서 단 하나, 유일무이한 패러다임인 인류 역사의 정점이 될 수밖에 없는 최대의 대사건이다. 그래서일까? 2000년의 긴 시간을 보내면서도 많은 사람이 그 사건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런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워낙 그 사건 자체가 믿기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진짜인지 ‘증거(?)’를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다. 오죽했으면 3년간을 함께 생활했던 당시 그분의 제자 토마스마저도 직접 눈으로 그분의 상처를 확인하고서야  어렵사리 스승의 부활을 믿게 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증거는 너무나 단순하고 확실하게 드러나 있다. 너무나 단순하기에 오히려 간과하기 쉬운 증거 말이다. 그것은 바로 ‘빈 무덤’ 이다.     무덤은 ‘죽음’의 상징이다. 무덤을 보면서 아무도 그 안에 묻혀 있는 사람의 주검을 의심하지 않는다. 무덤 자체가 바로 죽음의 가장 확실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성서 안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장황한 과학적 증거가 아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그분의 시신이 묻힌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한마디로 나와 있다.   그 까닭에  ‘빈 무덤’은 부활절을 맞는 우리 모두에게 부활의 기쁨이다. 인간이면 누구나 갖게 되는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의 해방이기에 우리는 기쁠 수밖에 없다. 더 이상 무시무시한 죽음의 원인인 질병과 사고, 재난, 실패와 좌절, 절망과 공포마저도 우리를 가두어 놓지 못한다는 ‘부활’에 대한 믿음과 희망으로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성서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내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은, 어떤 처지에서도 항상 기뻐하십시오! 항상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언제나 기도하십시오( 데살로니까 전서5:16)”라고 일깨워 주시고 있는 것 아닐까.   모두 행복한 부활절 보내세요! 해피 이스터(Happy Easter)! 김재동 / 가톨릭 종신부제열린광장 무덤 예수 예수 부활 예수 그리스도 무덤 자체

2024-03-28

[우리말 바루기] ‘덤테기’ 씌우지 맙시다

다른 사람으로 인해 억울하게 누명을 쓰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때 “내가 한 것도 아닌데 엉뚱한 사람에게 덤테기를 씌우지 마라”고 말하곤 한다. 여기에서 ‘덤테기’는 맞는 표현일까? 결론부터 얘기하면 ‘덤터기’가 맞는 말이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 ‘무데기’도 있다. 수북이 쌓여 있거나 뭉쳐 있는 더미 또는 무리를 나타낼 때  ‘무데기’란 말을 자주 사용한다. 그러나 이 역시 ‘무더기’가 옳은 말이다.   이처럼 ‘덤테기’ ‘무데기’로 쓰는 것은 ‘ㅣ’ 모음 역행동화 때문이다. ‘ㅣ’ 모음 역행동화는 앞에 오는 ‘ㅏ, ㅓ, ㅜ, ㅗ’가 뒤에 오는 ‘ㅣ’에 동화돼 ‘ㅐ, ㅔ, ㅞ, ㅙ’로 바뀌는 현상이다. ‘덤터기’ ‘무더기’의 ‘ㅓ(터, 더)’가 뒤에 오는 ‘ㅣ(기)’의 영향을 받아 ‘덤테기’ ‘무데기’처럼 발음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맞춤법에서는 ‘ㅣ’ 모음 역행동화가 일어난 낱말을 대부분 표준어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덤테기’ ‘무데기’는 ‘덤터기’ ‘무더기’가 맞는 말이다.     ‘아지랑이’를 ‘아지랭이’로, ‘가랑이’를 ‘가랭이’로, ‘곰팡이’를 ‘곰팽이’라고 하는 것도 모두 ‘ㅣ’ 모음 역행동화로 인해 일어난 현상이다. 그렇다면 ‘놈팽이’ ‘놈팡이’는 어느 것이 맞을까? ‘놈팽이’란 말이 익숙하지만 이 역시 ‘ㅣ’ 모음 역행동화가 일어나지 않은 ‘놈팡이’가 맞는 말이다.우리말 바루기 덤테기 모음 역행동화 대부분 표준어

2024-03-28

[손헌수의 활력의 샘물] 몰입하라

세계적인 기업들이 직원들의 업무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연구하는 과제를 살펴보면 “몰입”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직원들의 복리를 증진해주고, 직원 및 직원 가족의 편의를 도모하는 회사의 정책들을 살펴보자. 개를 데리고 출근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출퇴근 버스를 운영하는 것, 직장에서 유아원을 운영하는 것, 다른 회사보다 급여를 많이 주는 것조차도, 서글프지만 모두, 사실은 어떻게 하면 종업원들이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업무에 몰입을 하도록 만들 수 있을까 하는 데서 출발한 것들이다.   시카고 대학에서 교육학과 심리학을 가르쳤고 이 “몰입”이라는 주제로 유명해진 칙센트 미하이(Mihaly Csikszentmihalyi)라는 심리학자가 있다. 이 사람은 몰입을 “Flow”라고 부른다.     이 교수에 따르면, Flow는 “삶이 고조되는 순간, 물 흐르듯이 행동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며, 시간의 흐름이나 공간, 더 나아가서 자신에 대한 생각까지도 잊어버리게 될 때를 일컫는 심리상태”라고 정의한다. 한마디로 한가지에 너무나 정신을 집중한 나머지 무아지경이 되는 단계이다.     칙센트 미하이 교수는 몰입의 상태가 되면 자신감이 넘치고 창조적인 생각이 마구 터져 나오게 된다고 한다.     ‘직원을 몰입시켜라’고 하는 주제는 직원을 단 한 명이라도 고용하고 있는 고용주 입장에서는 솔깃해질 이야기다. 특히나 귀에 이어폰을 꼽고 하루 종일 음악을 듣는 직원이나, 회사에서 휴대폰으로 하루 종일 게임을 켜놓고 일하는 직원을 둔 고용주들에게는 말이다.     반대로 대다수를 차지하는 직장인들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회사에 이용을 당하는 것 같아서 서글프고 괴로운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몰입”의 학자 칙센트 미하이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오랫동안 ‘일’은 필요악으로 여겨진 반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행복에 이르는 지름길로 받아들여졌다. 여가를 즐기는 데는 특별한 재주가 필요 없고 아무나 즐길 수 있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여가는 일보다 즐기기가 더 어렵다.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시간이 주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효과적으로 쓰는 요령을 모르면 삶의 질은 올라가지 않는다. 그것은 절대로 사람이 저절로 터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은퇴를 하신 고객들을 만나면, 은퇴 후, 처음 1~2년은 그동안 못 다닌 여행을 실컷 다니지만, 그 시기가 지나면, 무기력함을 느낀다고 고백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쓸데없이 빈둥거리면서 매일 자신이 뒤쳐지는 것 같은 느낌 속에서 괴로워하면서 살고 있는가? 반면에 땀 흘려 열심히 일을 한 뒤에 느끼는 뿌듯한 성취감은 느껴본 사람만이 안다.   회사가 자신을 “몰입”까지 시켜가면서 착취한다고 느끼는 직원들이 있다면 자기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몰입”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보자.     자신이 잘하는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 성과도 내고, 인정도 받고, 돈도 벌고, 기쁨도 누린다면 최고의 일이 아닐까? 그래도 뭔가 이용 당하는 것 같다면 둘 중에 하나다. 지금 당신의 회사가 “몰입” 정책에 실패하고 있던지, 당신의 몰입이 아직은 부족한 것이다. 오늘, 단 한 순간이라도 몰입해 볼 작정이다. (변호사, 공인회계사)       손헌수손헌수의 활력의 샘물 몰입 직원 가족 고용주 입장 미하이 교수

2024-03-28

[사설] 다수당 되면 뭘 하겠다는 것인지부터 밝혀라

━ 혐오·증오에 가려 미래 청사진 안 보여 ━ 국가 미래와 민생 계획 내놓고 경쟁해야 22대 국회의원 총선거의 공식 선거운동 기간이 어제부터 시작됐다. 선거운동 첫날 여야 모두 심판론을 들고 나왔다. 국민의힘 한동훈 비대위원장은 “이·조(이재명·조국) 심판은 민생”이라고 말했고,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윤석열 정권 심판은 대한민국 정상화와 민생 재건의 출발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선거에선 남을 심판하기 이전에 자신이 무엇을 하겠다는 것을 먼저 유권자들에게 밝히는 게 도리다. 도대체 각 당은 원내 다수당이 되면 무슨 일을 하려 하는가. 어떤 비전과 정책을 준비하고 있는가. 특히 각 당은 자신들에게 힘을 몰아달라고 호소하지만, 우리 정치에선 특정 정당의 국회 독주가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은 사례가 적잖다. 민주당은 2020년 총선에서 180석(위성정당 의석 포함)이라는 절대다수 의석을 확보했다. 당시 청와대도 민주당 차지였다. 그런 절대권력으로 민주당이 이룬 성과는 과연 뭔가. 민주당은 21대 국회가 열리자마자 부동산 거래 전 과정에 징벌적 세금을 부과하는 세법 개정안을 단독 처리했다. 분양가 상한제 주택에 거주 의무를 부여하는 주택법 개정안, 전세대란을 야기한 임대차 3법도 밀어붙였다. 그 결과는 사상 초유의 부동산가 폭등이었고, 정권 교체의 씨앗이 됐다. 2012년 총선에선 새누리당이 152석으로 단독 과반을 차지했다. 그 기세를 이어받아 새누리당은 그해 연말 대선까지 승리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집권 기간 내내 소통 부재와 당·청 갈등으로 잡음이 일었다. 결국 2016년 총선을 앞두고 친박-비박의 계파 갈등이 폭발하면서 자멸의 길로 빠져들었다. 역설적으로 1988년 총선에서 탄생한 여소야대의 4당 체제에서 국회가 가장 역동적이고 생산적이었다는 평가가 다수다. 안타깝게도 지금 선거 구도는 상대에 대한 혐오와 증오의 프레임이 워낙 강력해 좌우의 강경파들만 득세할 뿐 합리적 중도 세력이 설 자리가 좁다. 선거가 목전이지만 지난주 한국갤럽 조사(3월 19~21일)에서 무당층 비율이 18%나 나온 이유다. 선거는 과거에 대한 회고적 분노만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희망을 펴는 이벤트가 돼야 한다. 지금 한국은 저출생과 고령화, 북핵 위협, 기업 경쟁력 약화, 수도권 집중화, 기후위기 등 풀어야 할 국가적 과제가 산적해 있다. 선거에서 단순히 경쟁 상대를 욕하고 비방한다고 이런 문제들이 과연 해결될 리가 있겠는가. 여야 지도부는 선거운동 기간에 다수 의석을 얻는다면 어떤 식으로 국가적 과제들을 해결할지 먼저 설득력 있는 공약들을 분명히 제시해야 한다. 혐오와 복수의 언어에만 매몰돼 미래는 실종된 게 지금의 총선 국면 아닌가. 어제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된 만큼 네거티브 경쟁이 아니라 국가 미래와 민생 정책을 내놓고 경쟁하기를 기대한다.

2024-03-28

[사설] ‘외교의 국내 정치화’로 냉각된 한·중, 반전 돌파구 찾아야

━ 지난 1년 국내 정치용 발언들 뒤섞여 경색 지속 ━ “주중 대사 갑질” 논란 겹쳐 외교 일선도 어수선 지난해부터 얼어붙었던 한·중 관계가 1년이 되도록 해빙의 계기를 찾지 못하며 삐걱거리고 있다. 2022년 11월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렸던 윤석열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첫 대면 정상회담 이후에 고위급 접촉은 사실상 끊긴 상태다. 이런 가운데 국내 정치에 외교를 끌어들이는 언행들까지 계속 이어지면서 양국 관계의 불신만 더 키우고 있다. 양국 관계가 불편해진 구조적 배경에는 패권을 놓고 맞부딪쳐 온 미·중의 전략 경쟁이 자리하고 있다. 지난해 4월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한·중 관계에 불똥이 그대로 튀었다. 당시 윤 대통령이 외신 인터뷰에서 “힘에 의한 양안(兩岸)의 현상 변경에 반대한다”며 동맹 강화를 추진 중인 미국 측 논리에 가까운 입장을 밝히자 중국 외교부가 즉각 반발했다. 비외교적 표현인 불용치훼(不容置喙), 즉 “타인의 말참견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반발하면서 한·중 관계가 급랭했다. 지난해 6월 싱하이밍(邢海明) 주한 중국대사의 발언은 여기에 기름을 부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를 만난 싱 대사는 “미국이 중국을 압박하는 상황에서 미국이 승리하고 중국이 패배할 것이라 베팅하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라고 말해 파문을 일으켰다. 한국 외교부는 싱 대사를 초치해 강하게 항의했고, 관계가 더 경색됐다. 양측이 경색을 풀어 갈 전기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난해 11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샌프란시스코에서 미·중 정상이 만나 갈등을 일시 봉합하면서 한·중 관계에도 정상화를 모색할 기회가 있었다. 미·중 정상회담 직후 부산에서 열린 한·중·일 3국 외교장관 회의에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이 참석했고, 2019년 이후 중단된 한·중·일 3국 정상회의의 조속한 재개 방안을 논의했다. 하지만 이후 구체적 진전 없이 지금껏 세월만 보내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이재명 대표가 최근 “그냥 중국에 셰셰(謝謝·고맙다)하면 된다”고 발언해 다시 논란을 키웠다. 중국 관영 매체는 “이 대표가 윤 대통령에게 경고했다”며 한국 정부 비판에 이 대표 발언을 이용하고 있다. 어제는 주중 한국대사관에 근무하는 한 주재관이 “정재호 대사가 부하직원들에게 갑질했다”며 외교부에 신고한 사건이 돌출했다. 외교부가 사실 확인 중이라지만, 싱 대사에 이어 윤 대통령의 고교 동기인 정 대사마저 불미스러운 논란에 휩싸인 것은 유감스럽다. 현안이 산적한 한·중 관계를 풀 시간도 모자랄 판에 주중대사관 직원들이 대사의 잦은 폭언을 녹취하느라 시간을 쓰고 있다니 어이가 없을 뿐이다. 외교부는 신속히 이 사건을 조사·정리하고, 중국과의 관계를 반전시킬 돌파구 모색에 전념해야 한다.

2024-03-28

[중앙시평] 고준위 방폐물 특별법, 21대 국회가 매듭지어야

4·10 총선으로 어수선한 가운데 21대 국회는 5월 29일 종료된다. 현재 국회에 접수된 법률안은 2만5785건이고, 미처리 법안은 1만6333건이다(국회의안정보시스템). 정부 발의안은 3.2%로, 필자가 정부에서 일하던 15·16대에 비하면 의원 입법이 크게 늘고 가결률은 급감했다. 법사위에 계류된 민생법안은 400건 이상이고, 상임위 문턱을 넘지 못한 것도 다수다. 5월 국회가 개점휴업하는 경우 민생법안은 무더기로 자동 폐기된다. 그중에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방폐물) 관리 특별법도 들어있다. 우리나라 방폐물 관리 정책의 역정은 험난했다. 1978년 고리 1호기 가동 후, 1983년부터 아홉 차례 추진된 고준위 방폐물 정책은 줄줄이 무산됐다. 당초 1988년 ‘방폐물관리기본방침’은 동일 부지 내에 95년까지 중·저준위 영구처분시설, 97년까지 사용후핵연료 중간저장시설 건설이었다. 그러나 89년 경북 후보지역 조사, 91년 안면도, 95년 굴업도 처분장 계획이 잇따라 백지화되고 2003년 부안사태에서 소요는 절정에 달했다. 원전 46년 역사 동안 미해결 과제 원전 내 임시저장시설 포화 상태 법 제정돼야 부지 선정 작업 시작 총선 후 5월 회기에서 처리하기를 2004년 노무현 정부는 정책 기조를 바꾸어 중·저준위 처분장과 고준위 중간저장시설을 별개로 건설하기로 한다. 2005년 중·저준위 특별법은 “사용후핵연료 관련 시설은 유치지역 안에 건설하면 안 된다”고 못 박았다. 그로써 19년 만에 중·저준위 처분장 부지는 경주지역으로 선정됐지만, 고준위 처분은 기약 없이 밀렸다. 잇따라 풍파를 겪으며 역대 정부는 ‘국민의 공감’을 얻겠다고 강조했다. 원자력은 가치에 민감하고 찬반 선호가 갈리는 분야다. 뇌과학 연구는 사람의 가치가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니 한 쪽이 다른 쪽을 설득하기 쉽지 않다. 2014년 박근혜 정부는 ‘출발부터 삐걱거린다’는 공론화위원회를 거쳐 ‘고준위방폐물관리기본계획’(2016년)을 내놓았다. 원전 가동 38년 만에, 고준위 방폐물 관리정책 시도 33년 만의 결실이었다. 구체적 계획이 없는 로드맵이었으나 2020년까지 부지 선정, 2035년 중간저장시설, 2053년 영구처분시설 가동이라는 목표가 제시된다. 이후 2017년 문재인 정부는 부지 선정 작업에 들어가는 대신 사용후핵연료 관리정책 재검토위원회를 출범시킨다. 위원회의 첫 번째 권고는 특별법 제정이었다. 후속 조치로 발표된 제2차 기본계획(2012년)은 제1차와 내용이 비슷해서, 부지 선정 절차 개시 후 13년 내 부지 확보, 20년 내 중간저장시설 건설, 37년 후 영구처분시설 확보였다. 선진국도 시행착오를 겪었다. 세계 최초로 고준위 방폐장 건설에 성공한 핀란드는 1977년 원전 도입 후 6년 만에 부지 선정에 나서 2000년에 올킬루오토를 부지로 확정한다. 이후 2016년 착공으로 450m 지하에 ‘온칼로’(洞窟)를 건설해서 내년부터 가동할 예정이다. 제2주자인 스웨덴은 1977년 법 제정 후 부지 선정에 들어갔으나 공사를 하려다 반발에 부딪쳐 표류한다. 그 뒤 1992년 원점으로 돌아가 지방정부에 서한을 보내는 등 재작업을 거쳐 2009년 포스마크를 부지로 선정한다. 2022년에는 고준위 처분시설 사업 허가를 발급했다. 우리 사용후핵연료는 원전 내 임시저장을 하고 있다. 그런데 저장공간이 차고 있다. 그동안 저장조의 포화 시점이 계속 바뀌면서 신뢰를 잃은 측면이 있으나, 고밀도 조밀 저장대와 저장대 추가 설치 등으로 대응해 왔다. 이제 한계에 이르러 2031년 고리·한빛부터 2032년 한울, 2044년 신월성 등의 순서로 포화된다고 한다. 2022년 2월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녹색분류체계에 원자력을 녹색 경제활동으로 포함하면서 2050년까지 고준위 방폐물 최종처분 시설을 운영하는 계획을 수립하라는 조건을 달았다. 21대 국회는 4개의 고준위 특별법안을 놓고 십여 차례 논의한 끝에 대체로 두 가지 쟁점을 남겼다. 원전 부지 내 건식 저장시설 규모와 고준위 방폐물 처분장 확보 시점이 그것이다. 고준위 방폐물 관리 원칙에는 기술혁신 가능성 등을 고려해 재검토할 수 있는 의사결정의 ‘가역성’이 있다. 즉 조건 변화에 따라 법률은 변경할 수 있다. 이쯤해서 최종 합의를 도출해야 한다. 요약하자면, 원전은 현존하는 기술이다. 원자력 전기를 쓰는 한 사용후핵연료 관리는 반드시 해야 한다. 원전 가동 46년 역사에서 30여년 만에 보수·진보 정권이 각각 두 차례 기본계획을 내놓았다. 이제 2차 기본계획 시행을 위한 특별법 제정 차례다. 법적 근거가 있어야 부지 선정과 지역주민 지원을 할 수 있다. 더 이상 미룬다고 새롭게 나올 것도 없다. 이대로 ‘폭탄 돌리기’를 계속한다면, 전기가 끊기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20대 국회에서 자동폐기됐던 전철을 밟지 말고, 5월 회기 내에 국가적 난제를 풀어야 한다. 한때 국회에 몸담았던 사람으로서, 전력수요가 급증하는 AI 시대의 21대 국회가 국가 전력 공급체계 안정화 등 민생법안 처리의 책무를 다해 줄 것을 간곡히 호소한다. 김명자 KAIST 이사장·전 환경부장관

2024-03-28

[강주안의 시시각각] 방치될수록 위험해지는 공수처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던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가 정치권에 핵폭탄을 투척했다. 이종섭 주호주 대사에 대한 출국금지 조치를 통해서다. 검찰을 비롯한 수사기관이 수시로 취해온 출국금지 조치는 통신 조회와 함께 고질적 인권 침해 요소로 꼽혀왔다. 법원의 영장 없이 진행된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더욱이 공수처는 출범 초기 야당과 언론에 대한 통신 조회를 남발해 인권 침해 논란의 중심에 선 전력이 있다. 이번 수사를 두고서도 “공수처의 장기간 출국 금지는 심각한 인권 침해”(전직 검찰 간부)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그러나 이번 출금은 전직 국방부 장관이 대상자로 확인되면서 사뭇 다른 양상이 전개되고 있다. 이 대사는 국방부 장관이던 지난해 집중호우 실종자 수색 도중 순직한 해병대 채수근 상병 사건과 관련해 수사 대상에 올랐다. 그의 혐의를 두고선 “군에는 사망 사건 수사권이 없기 때문에 직권 남용이 성립하지 않는다”(전직 고위 군법무관)는 반론이 나온다. 그러나 유·무죄를 차치하고 수사가 안 끝난 그를 대사에 임명한 인사가 합당했느냐 하는 논란으로 번졌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과 김은혜 전 대통령실 홍보수석이 “즉시 귀국”을 요구할 정도로 정부가 궁지에 몰렸다. 공수처의 출금 하나가 던진 파문이다. ━ 이종섭 대사 출국금지로 핵폭탄 공수처만큼 논란을 몰고 다닌 기관도 드물다. 수사 대상인 실세 검찰 간부를 차로 모셔온 ‘황제 조사’ 논란이 대표적이다. 미숙한 헛발질을 연발하던 공수처가 지난 1월 검찰 내 엘리트로 꼽히는 손준성 대구고검 차장검사(검사장)에 대해 1심에서 유죄를 받아냈다. 포렌식을 동원한 치밀한 수사를 통해서였다. 검찰을 비롯해 공직자 비리를 감시하라는 설립 취지에 걸맞은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공수처가 생기기까지 국회에서만 20년 넘는 숙성기간을 거쳤다. 각종 문헌은 우리나라 공직 수사의 역사가 1000년 이상 거슬러 올라갈 뿐 아니라 관료의 죄목에도 유사점이 있음을 보여준다. 고려 시대인 1146년에 어사대가 압록강 수군 익사 사고의 책임을 물어 병마사를 처벌했고, 조선 시대에도 1615년 사헌부가 조직을 비호한 의금부의 고관을 기소한 기록이 나온다. (강효백 『공수처』 등) 어렵게 설립한 공수처의 취지를 퇴색시킨 건 문재인 정부다. 당시 더불어민주당이 여야 합의를 깨고 정권에 유리하게 바꿔 강행 처리했다. “공수처장 임명이 집권 여당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방향으로 흐르게 될 것”(정웅석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법과 제도의 이해』)이라는 해석이 따랐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초창기 어설픔을 극복하고 굵직한 공직 관련 이슈를 사회에 던지기 시작했다. ━ 수장 공석에 리스크 관리 어려움 ━ 정상화 미루면 정권 부담 더 커져 하지만 지난 1월 김진욱 초대 공수처장이 퇴임한 이후 처장은 물론 차장까지 공석인 상황이 길어지고 있다. 공수처장 후보 추천위가 판사 출신 오동운 변호사와 검사 출신 이명순 변호사를 추천한 게 한 달 전이다. 두 사람 모두 우파 성향이라는 평가다. 오 변호사와 함께 근무했던 전직 고위 법관은 “보수 성향으로 극우는 아니며 합리적인 성품”이라고 말한다. 이 변호사를 잘 아는 전직 검찰 간부는 “특수수사통은 아니지만 다양한 수사 경험을 갖췄다”고 평가했다. 누가 돼도 무리 없다는 평판이니 윤석열 대통령이 한 명을 선택해 절차를 밟으면 된다. 당장 이 대사 수사 처리를 위해서도 정상화가 시급하다. 여권에선 “공수처 수사에 문제가 많다”고 비난하지만, 수장이 와야 해결될 사안이다. 고위 공직자만을 겨냥하는 조직이 정부 입장에선 달가울 리 없다. 문재인 정부가 밀어붙인 공수처였으나 ‘1호 사건’으로 진보 성향인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의 특혜 채용 의혹을 골랐다. 2심까지 징역형이 나왔다. 공직자 비위를 수사하는 기관의 숙명이다. 정권에 눈엣가시 같은 존재라고 해서 비정상적인 상태를 오래 방치하면 위험은 계속 자라난다. 누구에게 또 어떤 공격이 들어갈지 두렵지도 않은가. 강주안(jooan@joongang.co.kr)

2024-03-28

尹캠프 보건총괄 "정부 2000명 고집 말고, 의사 사직서 거둬야" [신성식의 직격인터뷰]

윤 캠프 보건위원장 박은철의 의료사태 해법 의대 정원 확대를 둘러싼 혼란이 한 달 넘게 이어지고 있다. 전공의 이탈에 이어 의과대학 교수의 집단 사직이 줄을 잇는다. 의대 교수는 피로 누적을 이유로 외래 진료까지 축소하고 있다. 수술이 무기한 연기된 환자들은 불면의 밤을 보내고 있다. 나중에라도 수술을 받아야 할 처지라 의사 눈치 보느라 대놓고 불만을 토로하지도 못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연일 의료계의 대화 참여를 촉구하고 예산 편성까지 협의하겠다고 나섰지만, 의사들은 요지부동이다. 의대 교수들은 “2000명 증원 철회”를 대화의 선결 조건으로 내세운다. 임현택 대한의사협회 신임 회장은 오히려 의대 정원 축소를 주장하고 있다. 2000명 고수하면 대화 불가능, 대화 의제에 포함해야 급격히 늘리면 줄이기 힘들고 기초의학교육 부실해져 ‘1000명 10년 증원’ 바람직, 의과학과 400명 검토 필요 의대 교수는 마지막 보루, 의사 본분 벗어나지 말아야 이런 상황에서 윤 대통령의 2022년 대선 캠프 정책총괄본부 보건바이오의료정책분과 위원장을 지낸 박은철(62) 연세대 의대 교수(예방의학)에게 엉킨 실타래를 풀 수 있는 방안을 들었다. 박 교수는 20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사회복지분과 자문위원을 지냈고, 지금은 국민의힘 정책위원회 지역필수의료혁신TF 민간위원을 맡고 있다. 박 교수는 의료계와 정부를 향해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한동훈 위원장 역할 더 필요 Q : 사태의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A : “정부가 ‘2000명 증원 방침’을 수정하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는다. 의료계도 환자를 떠나 있으면 결코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진료에 복귀해서 대화를 개시해야 한다.” Q : 대화가 진행되지 않는 이유는. A : “2000명이라는 숫자를 고정한 상태에서 대화하자고 하니 잘 풀리지 않는다. 정원 문제를 의제에 포함해야 한다. 국민의힘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이 좀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본다.” ‘2000명 선 시행, 후 조정’ 비현실적 Q : 일단 2000명을 시행하고 내년에 재조정하자는 주장이 나오는데. A : “현실성이 떨어진다. 충북대 의대의 경우 49명 정원을 200명으로 늘렸다가 다시 줄이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그럴 바에 차라리 2000명을 계속 늘리는 게 낫다.” Q : 의사를 늘려야 하지 않나. A : “서울·수도권에서 일상적인 진료를 받을 때는 부족하지 않다고 느낄 수 있다. 하지만 필수의료 의사, 지역 의료 의사는 분명히 부족하다. 이건 현재 시점의 문제이다. 의대 증원과 관계없이 당장 풀지 않으면 안 된다.” 박 교수는 왜 ‘2000명 증원’을 풀자고 주장할까. 박 교수는 한국보건사회연구원·한국개발연구원 등의 3개 보고서와 별도로 인구·의료이용·진료량 등의 데이터를 활용해 향후 의사 인력을 추계했다. 3개 보고서처럼 2035년 의사가 1만명 부족하다고 나왔다. Q : 1만명 부족해서 1만명 늘리자는 게 잘못인가. A : “한국은 고령화 속도가 세계에서 가장 빠르다. 올해보다 내년이, 내년보다 그다음 해가 더 심해진다. 의사 수요가 급격히 늘어나지만 2035년 이후를 잘 봐야 한다. 조금씩 의사 부족(의료 수요) 현상이 줄어들고, 2045년에 의사 수요와 공급이 일치한다. 이후 의사가 남기 시작해 2070년 10만명 넘친다. 정부 계획대로 가면 수요·공급 일치 시점이 2040년께로 당겨진다.” Q : 수요가 급격히 느니 의사도 급격히 늘려야 하지 않나. A : “의료 수요가 가파르게 느는 건 맞다. 다만 2010~2020년 노인 인구 증가율이 그전보다 떨어지는 추세다. 2000명씩 가파르게 늘리면 나중에 줄일 때 부작용이 생길 수밖에 없다. 게다가 출산율이 0.6명대로 급락하지 않았느냐. 이런 게 의료 수요에 다 영향을 미친다.” 그는 “통계청의 장래인구 추계가 나올 때마다 그 전 추계보다 평균수명은 조금 늘고, 출산율은 훨씬 낮아진다”며 “이런 현상 탓에 예측보다 의료 수요가 더 줄어 의사가 더 남게 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박 교수는 또 “대폭 증원이 교육을 어렵게 할 것”이라고 말한다. Q : 정부가 의대생이 본과에 들어가는 2027년까지 여건을 맞추겠다는데. A : “시설과 장비는 어떡하든 맞추고 임상 진료 의사는 구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기초의학 담당 교수는 당장 구하기 어렵다. 기초의학은 20년 동안 곪을 대로 곪았다.” Q : 이공계 박사를 활용할 수 없나. A : “한계가 있다. 그들이 전공한 심장을 가르칠 수는 있으나 이와 관련된 폐까지 짚어주기는 힘들다.” 서울 0명, 나머지 50% 증원이 적정 Q : 대안이 있나. A : “정부가 40개 의과대학에 배정한 증원 규모를 그대로 인정한 상태(서울은 0명)에서 세 가지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 1안은 현 정원의 두 배까지만 늘린다. 그러면 1494명 증가한다. 2안은 60%까지만 늘리는 안이며 1093명 증가한다. 3안은 50%까지 늘리며 956명 늘어난다.” 박 교수는 “1안도 교육 여건이나 향후 감축 과정을 고려하면 선택하기 쉽지 않다. 3안, 2안 순으로 적합하다”며 “1000명을 10년 늘리는 것도 대안”이라고 말한다. 여기에다 2026학년도에 50명 정원의 의과학과(의사과학자 양성)를 4개 대학에 신설해 200명을 뽑고, 이듬해 4개 대학을 추가해 400명으로 늘리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경희대·부산대·원광대·동국대 등 의대·한의대를 둔 5개 대학의 한의대 정원 350명을 의대로 전환하자고 제안한다. 이렇게 하면 2000명을 늘리는 효과를 낼 수 있다고 한다. 박 교수는 “특히 신설 의대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 나중에 지금 40개 의대도 통합해야 할 텐데 더 늘려서는 곤란하다”고 덧붙였다. 박 교수는 “정원 문제까지 포함해 대화해야 윤 대통령의 ‘불통’ 이미지를 줄일 수 있다”고 말한다. 필수 패키지 대책 95점, 지역의료 80점 Q : 필수의료 패키지를 어떻게 보나 A : “잘 만든 대책이다. 필수의료 대책은 95점, 지역의료 대책은 80점이다. 교통사고특례법처럼 의료사고 형사처벌 특례법 제정을 제시한 점은 평가할 만하다. 그동안 문제점으로 지적된 것들을 빠짐없이 담았다. 2000명 증원 빼고는 크게 문제 삼을 게 없다. 그런데 2000명 증원을 좀 더 일찍 공개했으면 시뮬레이션을 해서 따져볼 수 있었을 텐데,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나오는 바람에 토론할 기회가 없었다. 적정 의사가 어느 정도인지 토론회 한 번 한 적이 없다.” Q : 보완할 점은 뭔가. A : “수가 인상 계획을 구체화해야 한다. 또 응급·야간은 무조건 올려야 한다. 진료 과목이 아니라 세부 과목으로 접근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 뇌 수술 같은 신경외과 분야를 지원하고 척추 같은 데는 뺄 수 있다. 뇌·심장·암 등의 고난이도 행위는 돈을 더 주는 게 맞다. 골든 타임이 있는 분야는 어떡하든 수가를 크게 올려야 한다.” 박 교수는 의료계의 집단행동에도 일침을 가했다. 박 교수는 “의료계가 2020년 의대 정원 파업에서 완벽한 KO승을 거둔 기억을 되살려 이번에도 밀어붙이면 되겠다고 생각하는 듯하다”며 “정부를 굴복시키고 백기 투항을 받을 수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비판했다. Q : 2020년 파업 때와 이번이 다른가. A : “현 정부는 이전 정부와 스타일이 다르다. 이번 사태의 환경도 2020년 파업 때와 다르다. 당시 정부가 공공 의대를 만들되 시민단체가 추천한 학생을 뽑게 하려다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코로나19와 싸우는 전사(의사)를 힘들게 한다는 동정적 여론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런 게 없다. 다만 이번 정부가 의대 정원 확대 규모를 2000명까지 높게 잡지 않았으면 의료계의 큰 반발 없이 넘어갔을 수도 있는데, 아쉽다.” 아무리 억울해도 환자 외면 안돼 Q : 의대 교수 사직이 이어지고 있다. A : “아무리 억울한 일이 있어도 본분을 벗어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눈앞의 환자를 외면해서도 안 된다. 대화가 시작되려는데 물리적 행동을 하는 건 곤란하다. 협상 도중에 망치를 들어서야 되겠나. 사직서를 낸 게 잘못이다. 이를 취소하고 협상하는 동안 보류해야 한다. 대학병원 교수는 환자의 최후의 보루이다. 쓸 수 있는 무기가 사표밖에 없는데 아껴야 한다.” Q : 의료계가 흩어져 있다. A : “의사협회·병원협회·교수·전공의·의대생 등 5개 직역 대표단을 구성해야 한다. 2000년 의약분업 파동 유사하게 10인 소위원회를 꾸려 타협을 끌어냈다.” Q : 환자들의 고통이 커지고 있다. A : “의료 파행이 더 길어지면 의사 집단이 국민 신뢰를 크게 잃게 될 것이고 이를 회복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Q : 사태가 끝나면 전공의가 돌아올까 A : “전공의는 50%, 의대생은 80% 돌아올 것으로 본다. 이참에 대형병원도 전공의 의존 구조에서 탈피해야 한다. 입원환자 전담 의사를 비롯해 전문의와 진료 지원 인력(PA)을 늘려 전공의의 빈자리를 메워야 한다. 정부는 조속히 법률과 수가로 뒷받침해야 한다.” ◆박은철(62)=연세대 의대 출신의 예방의학 전문의이다. 미국 존스홉킨스대학에서 박사후과정을 밟았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조사연구실장, 한국보건행정학회장, 여의도연구원 정책자문위원 등을 거쳤다. 현재 기재부 서비스산업발전TF 위원, 제21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신성식(ssshin@joongang.co.kr)

2024-03-28

[이익주의 고려, 또 다른 500년] 거란전 승리 후 권위 세우려 아버지 과거 미화

현종, 고려의 중흥군주 조선에 ‘태정태세문단세’가 있다면, 고려에는 ‘태혜정광경성목’이 있고, 목종 다음이 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으로 유명해진 현종(재위 1009~1031년)이다. 고려의 제8대 국왕이며, 거란과의 전쟁 중 나주까지 피난하는 수고를 마다치 않았고, 72세의 노장군 강감찬을 최고 지휘관으로 발탁해서 귀주 대첩을 이끌어낸 국왕이다. 고려 역사는 이 전쟁을 기점으로 초기와 중기가 나뉜다고 할 정도지만, 현종 개인으로도 두 차례 전쟁을 거치며 놀랄 만큼 성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18세에 처음 왕이 되어서 28세에 전쟁이 끝났으니, ‘고려 거란 전쟁’은 청년 현종의 성장 기록이기도 하다. 과부 헌정왕후, 삼촌 왕욱을 사랑 자유분방 고려왕실도 왕욱 유배 왕욱의 아들 현종 어부지리 즉위 전쟁 치르며 어엿한 군주로 성장 중앙집권 완료, 고려 중흥 이끌어 아버지 유배 지워 출생 약점 숨겨 막장 드라마 같은 왕실의 사랑 현종은 출생부터가 얘깃거리다. 아버지는 태조의 아들 왕욱, 어머니는 태조의 손녀이자 경종의 부인인 헌정왕후 황보 씨였다. 이 짧은 문장 속에는 고려 초 왕실 혼인에 관한 낯선 사실이 여럿 담겨 있다. 경종도 태조의 손자이므로 경종과 헌정왕후의 결혼은 4촌 간의 근친혼이었다. 근친혼에 대한 인식이 지금은 안 좋지만, 그땐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경종이 죽은 뒤 과부가 된 헌정왕후가 궁궐 밖으로 나와 살다가 마침 옆집에 살던 삼촌 왕욱과 사랑에 빠졌고, 두 사람 사이에서 아이가 생겼다. 왕실 내의 이러한 자유연애(?)는 아무리 자유분방한 고려 초라고 해도 용납되기 어려웠다. 게다가 당시 국왕 성종은 유교 윤리를 퍼트리는 데 힘쓴, 도덕적으로 진지한 사람이었다. 성종에 의해 왕욱은 즉시 사수현(경남 사천)으로 유배되었다. 게다가 헌정왕후 마저 출산과 동시에 세상을 떠났다. 현종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는 멀리 유배지에 있어 고아나 다름없는 신세였다. 성종이 거두어 궁중에서 키웠는데, 두 살 때까지 유모가 ‘아빠’라는 말만 가르쳤다. 아이는 성종을 보고도 ‘아빠’를 불러댔고, 성종은 아이를 가엾게 여겨 사수현으로 보내 아버지와 함께 살게 했다. 아마 왕욱이 아들을 곁에 두기 위해 유모를 사주했을 것이다. 3년 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아들은 다시 혼자가 되었고, 여섯 살 때 개경으로 돌아와 대량원군이란 이름을 받았다. 하지만 그 뒤로 견제를 받아 목숨을 부지하기조차 힘든 신세가 된다. 헌정왕후에게는 비슷한 삶을 산 언니가 있었다. 경종비 헌애왕후로, 자매가 모두 경종의 부인이었다. 헌애왕후는 왕자를 낳았고, 이 아들이 성종에 이어 왕이 된 목종이다. 목종은 심약한 사람이어서 헌애왕후가 태후로서 섭정을 했는데, 천추전에 거처했으므로 천추태후라고 불렸다. 천추태후는 외간 남자 김치양과 사랑에 빠졌고, 아들까지 낳았다. 이 또한 불륜이었지만, 태후의 뜻을 거스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아들은 어머니 쪽으로 왕실의 피가 섞였으므로 엄연한 용손(龍孫)이었고, 천추태후는 이 아들로 후계자를 삼으려 했다.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은 29명의 부인으로부터 25명의 아들을 두었지만 건국 초 거듭된 정쟁 속에 희생되어 증손자 대에는 왕실의 씨가 마를 정도였다. 결국 출생에 약점이 있는 두 사람, 대량원군과 천추태후-김치양 소생(이름도 남아 있지 않다)이 왕위를 다투게 되었다. 천추태후는 열두 살이던 대량원군을 강제로 승려를 만든 다음 개경에서 멀리 떨어진 삼각산(북한산)의 신혈사로 옮기게 하고는 사람을 보내 죽이려고 했다. 태후가 보낸 떡과 술을 먹지 않고 버렸더니 까마귀와 참새가 먹고 그 자리에서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대량원군이 살해 위협을 받는 동안 목종의 정치는 불안하고 흉흉했다. 왕은 유행간(庾行簡)과 동성 간 사랑을 했고, 유행간은 총애를 믿고 국정을 농단했다. 또 김치양은 천추태후를 믿고 국정을 농단했다. 두 개의 비선 권력이 다투는 사이에 신하들은 좌불안석이었고, 누구도 백성들의 삶을 보살필 겨를이 없었다. 무능한 국왕은 김치양이 자신을 해칠 것이라고 의심해서 국경을 지키고 있던 강조에게 군대를 이끌고 들어와 자신을 보호하도록 명했다. 그와 동시에 대량원군을 불러들였다. 아마 양위할 생각이 있었던 듯하다. 강조는 왕명을 받들어 개경에 왔으나 오히려 목종을 폐위하고 천추태후도 쫓아내고 김치양과 유행간을 죽이고 권력을 잡았다. 그리고 목종이 대량원군에게 양위하려 한 사실을 모른 채 따로 사람을 보내 대량원군을 모셔오게 했다. 우연히도 목종과 강조가 대량원군 옹립에 일치했던 것이다. 비선 권력들 다투다 현종에게 왕위 이렇게 해서 현종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왕위에 올랐다. 그랬기 때문에 현종이 왕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따로 만들어졌다. 우선, 어머니의 태몽이다. 헌정왕후가 꿈을 꾸었는데, 곡령에 올라가 오줌을 누었더니 나라 안에 흘러넘쳐 은빛 바다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실은 이 꿈은 헌정왕후의 창작이 아니었다. 더 먼 옛날 김유신의 동생 문희가 이 꿈을 꾸었고, 태조 왕건의 증조할머니도 언니에게서 이 꿈을 산 적이 있었다. 이 꿈 덕에 모두 귀인을 만났는데, 헌정왕후는 특별히 ‘아들을 낳으면 왕이 되어 한 나라를 갖게 될 것’이라는 해몽을 얻었다. 대량원군이 숭교사에 머물 때는 어떤 승려가 큰 별이 절 마당에 떨어져 용으로 변하고 또 사람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는데, 바로 대량원군이더라는 꿈을 꾸었다. 또 대량원군이 꿈에 닭 우는 소리와 다듬이 소리를 들었는데, 해몽은 이러했다. 닭 우는 소리 ‘꼬끼오’는 곧 ‘고귀위(高貴位)’이니 높고 귀한 자리라는 뜻이고, 다듬이 소리 ‘어근당(御近當)’은 임금 자리가 가깝다는 뜻이므로 모두 왕이 될 징조이다. 예언대로 현종이 왕이 되었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 예언의 적중은 십중팔구 결과를 아는 뒷사람이 만들었기 때문이니, 현종이 즉위한 뒤에 만들어진 이야기가 틀림없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만들고 즐긴 사람은 바로 고려의 일반 민중으로, 현종의 즉위와 관련된 설화는 민중의 지지와 기대를 반영한다. 그렇지만 현실에서 현종은 허수아비 국왕일 수밖에 없었고, 모든 권력은 강조의 손아귀에 있었다. 그런데 즉위 이듬해에 거란의 침략으로 전쟁이 일어나 강조가 전사하고 말았다. 권력자의 죽음은 현종에게 기회가 되었다. 전쟁 중 현종은 나주까지 몽진을 떠났다. 호위하는 군사가 수십 명에 불과했고, 도중에 도적을 걱정할 정도로 궁색한 행렬이었지만, 끝내 자리를 보존했고 거란과 협상을 벌이며 어느덧 항쟁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1011년 2차 전쟁이 끝난 뒤에는 언제 이런 준비를 했을까 싶을 정도로 국왕으로서 성숙한 모습을 보였다. 전쟁의 충격을 안정적으로 수습했으며, 공정한 논공행상을 통해 관료사회를 안정시켰다.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킨 김훈·최질 등을 직접 처단하는 용기도 보여줬다. 절정은 지방관 파견이었다. 1018년, 고려 건국 100주년이 되는 이 해에 현종은 전국에 116명의 지방관을 파견했다. 983년 전국에 12명을 파견하기 시작한 이후 35년 만에 이룬 성과로, 고려의 중앙 집권을 사실상 완료한 것으로 평가되는 업적이다. 현화사 비문 왕욱 유배 사실 숨겨 국왕의 지위가 안정되면서 스스로 권위를 만들 줄도 알았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추숭함으로써 출생의 약점을 지우려 했던 것이다. 사수현에 있던 아버지 묘를 개경으로 이장하고, 개경에 대자은현화사(大慈恩玄化寺, 줄여서 현화사)를 창건해 부모의 명복을 빌도록 했다. 역사에도 손을 댔다. 왕욱이 사수현에 내려간 것이 불륜에 따른 유배라는 사실을 숨기고, 거란의 침략으로 수도가 위험해지자 성종이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켰다는 내용으로 현화사 비석을 새겼다. 천안에 홍경사라는 절을 지으면서 여행객의 안전을 돌보는 것이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훈이란 사실을 밝혀 놓았다. 18세에 억지로 왕이 된 이 젊은 국왕은 즉위하자마자 국가적 위기를 겪으며 성장했다. 1019년 거란에 최종 승리를 거두었을 때는 더이상 어리고 나약한 국왕이 아니었다. 왕실의 번영에도 족적을 남겼다. 세 아들 덕종·정종·문종이 차례로 왕위를 이음으로써 목종 이후 끊어질 뻔했던 왕실이 다시 번성하기 시작했다. 이와 더불어 족외혼을 통해 왕실과 운명을 같이 할 외척이 등장했고, 고려 귀족 사회의 출발점이 되었다. 여러모로 고려의 중흥으로, 이 중흥주의 탄생은 위기를 기회로 만듦으로써 가능한 일이었다. 이익주 역사학자·서울시립대 교수

2024-03-28

메시아 병 걸린 정치인들 [문소영의 문화가 암시하는 사회]

‘파묘’가 천만 관객을 돌파하면서 장재현 감독의 전작인 ‘사바하’도 재개봉했다. 같은 오컬트 영화이지만 오락성이 강한 ‘파묘’보다 훨씬 심오한 내용을 담고 있다. (주의: 이후부터는 ‘사바하’의 간접 스포일러) 회의주의 목사(이정재)가 수상한 사이비종교를 추적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인데, 영화가 진행되면서 그 교주가 단순히 미륵불을 참칭하는 사기꾼이 아니라 정말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었으며 선행도 꽤 했던 존재임이 밝혀진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훗날 태어날 대적자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예언을 들은 뒤 대적자를 미리 제거하고자 무고한 생명을 해치며 타락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선(善)이며 잠재적 대적자들은 악(惡)이라고 믿는다. 그러니까 그 예언은 교주가 진정한 메시아로 거듭나느냐 악마로 전락하느냐의 시험이었던 셈이다. 메시아의 타락 다룬 영화 ‘사바하’ 예수도 ‘파시즘 독재’ 유혹 받아 고금 독재자 공통점은 메시아 병 최근엔 정치 팬덤이 병증 부추겨 예수는 악마의 달콤한 제안 거부 개신교 신자인 장 감독은 그리스도교적인 이야기를 메시아 신앙과 비슷한 불교의 미륵 신앙에 녹여서 독특한 영화 ‘사바하’를 만들어냈다. 교주가 든 시험은 예수 그리스도가 광야에서 홀로 고행할 때 받은 유혹을 닮았다. 이때 악마는 세 가지 제안을 했다. “당신이 신의 아들이면 돌을 빵으로 만들어보라.”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 당신이 신의 아들이라면 천사가 받쳐줄 것이다.” “나에게 엎드려 절을 하라. 그러면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주겠다.” 신이면서 인간인 예수는 이 제안을 모두 거부함으로써 인간으로서의 약점을 극복하고 진정한 메시아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 성경에 나오는 이 에피소드를 가장 탁월하게 재해석한 것은 단연 도스토옙스키(1821~1881)의 소설 『카라마조프 형제들』에서 이야기 속의 이야기로 등장하는 ‘대심문관’ 이야기일 것이다. 그 내용은 이렇다. 종교재판 시대에 절대 권력자인 대심문관 앞에 진짜 예수가 나타난다. 그러나 대심문관은 두려워하기는커녕 “왜 우리를 방해하러 왔소?”라고 따진다. 그리고는 “우리는 사실 당신이 거부했던 악마의 세 가지 제안을 당신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고 있소”라고 말한다. 즉 민중에게 빵을 나눠주고 기적을 보이고 이단을 심판해 세상 모든 나라의 믿음을 통일시켜 절대적 권위를 행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심문관은 예수가 왜 악마의 제안을 물리쳤는지도 잘 알고 있다. 인간을 먹을 것 등의 물질과 신비의 기적으로 굴복시키고 강제로 믿음을 통일하는 대신 인간이 자유롭게 신을 믿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신 예수는 인간을 너무 높이 평가했소”라고 그는 말한다. 이어지는 대심문관의 말을 요약하면 이렇다. ‘대부분의 인간은 자유를 감당해내지 못한다. 그들은 먹을 것을 위해, 돈을 위해, 자유를 기꺼이 희생할 수 있으며, 기적에 매달리며, 다양한 의견의 혼재를 견디지 못하고 통일된 정답을 원한다. 그러면 당신 예수는 이런 인간들은 버릴 것인가? 자유의지로 당신을 믿는 소수의 지혜롭고 강한 인간들만 돌볼 것인가? 우리는 당신의 이름으로 어리석고 나약한 인간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기적과 통일된 정답으로 그들의 영혼을 지배해서 평화를 주었다. 우리를 방해하지 말라!’ 이것이야말로 바로 전체주의 독재 아닌가. 소설 『카라마조프 형제들』에서 ‘대심문관’ 이야기를 쓴 것으로 설정된 회의주의 지식인 이반 카라마조프는 말한다. 대심문관은 진심으로 나약한 인간을 구원하겠다는 열망으로 고민하다가, 결국 그런 파시즘적 결론에 이르렀다고 말이다. “모든 운동의 선두에 섰던 인간 중에는 반드시 대심문관 같은 인간이 있었다”고 이반은 단언한다. 과연 그렇지 않은가. 진정 민족이나 국민을 구원하겠다는 열망으로 운동이나 혁명의 지도자로 나선 다음 나중에 법 위에 군림하는 독재자가 되어버린 동서고금의 정치지도자들은 대심문관의 닮은꼴인 것이다. 사적 권력욕에 불탄 독재자들 독재자 중에는 이처럼 진정한 영웅이었다가 타락한 경우뿐만 아니라 처음부터 사적 권력욕에만 불타던 경우도 많았다. 다만 이들의 공통점은 독재자가 되었을 때 메시아 이미지를 적극 이용했으며 스스로 메시아라 믿었다는 것이다. 중국 현대사 전문가인 네덜란드 역사학자 프랑크 디쾨터는 저서 『독재자가 되는 법: 히틀러부터 김일성까지, 20세기의 개인숭배』에서 이렇게 말한다. “권력을 잡은 독재자가 자신의 정적들을 제거하는 전략은 다양했다. (…) 결국에는 개인숭배가 가장 효율적이었다.” 공산주의 독재의 경우, 대중에게 어려운 변증법적 유물론 등의 마르크스주의를 설파하기보다 스탈린, 마오쩌둥, 김일성 등의 지도자를 “특정한 성스러운 존재로 둔갑시켜 공감을 조장하는 편이 훨씬 효과적이었다”고 디쾨터는 설명한다. 내셔널리즘 독재의 경우에도 무솔리니는 자신에 대한 개인숭배 조장과 적들에 대한 증오를 제외하면 지향하는 바가 모호했으며, "무솔리니와 마찬가지로 히틀러는 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에 더해서 자기 자신을 제외하면 내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특히 “히틀러는 신비주의적인 유사 종교에 기초한 유대를 강조하면서 자신을 대중과 하나로 연결된 메시아처럼 포장했다”는 것이다. 독재자 설친 20세기 비극 재발 막아야 걱정스러운 것은 총선을 앞둔 21세기 대한민국에도 저런 메시아 병(病) 증세를 보이는 정치인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들을 떠받치는 것은 정치 팬덤으로서, 미성숙하던 시절의 대중문화 팬덤을 매우 닮았다. 정치 팬덤은 정책보다 정치인 개인, 즉 그들의 ‘아이돌’에 대한 애정에 집중하고 ‘조공’을 바치고 소셜미디어에서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과 싸우며 증오를 불태운다. 그들은 또한 소셜미디어에 찬양 글과 그림을 올리는데, 그 중엔 사법부에 의해 각종 비리 범죄로 유죄 판결 난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로 묘사한 그림까지 있다. 문제의 정치인들은 아무런 부끄러움 없이 그 그림을 공유하고 전파한다. 메시아 병 말기 증상이다. 이들 정치인은 아직은 20세기 독재자들과 같은 힘의 스케일에는 이르지 못했으나 매우 위험하다. 그들은 20세기 독재자들의 두 가지 유형 중에서 ‘한때는 진정 영웅이었으나 타락한 메시아가 된 유형’보다 ‘처음부터 본인 권력이 목적이지만 합당한 사법적 판결을 마치 상대 진영의 종교적 박해인 것처럼 포장하고 자신을 순교자적 영웅으로 포장해서 상대 진영에 대해 막연한 혐오를 품고 있는 사람들에게 메시아가 된 유형’이기 때문이다. 반대 진영이 밉다고 해서 그들이 정말 메시아이거나 대안인지 한 번 냉정하게 돌아보자. 그것이 메시아 병 걸린 독재자들이 설친 20세기 비극의 재발을 막는 길이다.

2024-03-28

[안태환의 의학오디세이] 무엇이 중요할까

지방에서 올라온 환자는 아픈 이야기보다 하소연을 풀어냈다. 긴 병에 지친 환자는 사는 곳에서 여러 병원을 다녔지만 여전히 코로 숨을 쉬기 어렵다며 지역의료의 결핍을 원망했다. 처음 간 병원에서의 치료 기간을 물었다.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았다. 관찰 후 다양한 처치로 증상의 호전을 기대하기엔 짧은 시간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주 오래전 강원도에서의 군의관 시절, 축농증으로 힘겨워하는 병사들도 그랬다. 군 병원에 대한 불신 탓이 컸겠지만 “서울로 가야 될까요”를 늘 되묻던 기억이 떠올랐다. 축농증은 제법 긴 호흡이 필요한 치료이기에 늘 대답은 ‘굳이’였다. 만성적 질환이 아니고서야 일상적 생활 수칙을 지키며 처방된 약만으로도 경과는 나아지기 십상이다. 의·정 주장 반은 맞고 반은 틀려 의료개혁, 내용적 논쟁은 부재 필수과 책임질 대학만 증원해야 의사 증원 숫자 집착하지 않아야 지방에 있는 환자들은 지역의료에 대한 불안 속에 서울 큰 병원의 의료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희망을 갖는다. 수십 년이 지난 상황에서도 그 정서는 크게 달라져 있진 않아 보인다. 의료환경을 따지고 보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지방의 좋은 병원도 많으나 이른바 필수 의료의 공백도 엄연한 현실이다. 좋은 의사가 되어 있진 못해도 되려고 하는 태도이기에 환자의 사연을 마냥 듣다가 한없이 밀려있는 대기 환자들을 배려 못 하기 일쑤이다. 현대 의료 환경에서 공감 어린 감성 진료의 지난함은 대기 환자의 숫자와 연동된다. 통증의 호소이든 하소연이든 듣지 않고 어찌 공감 진료가 가능하겠는가. 서울 그리고 수도권 병원들은 모두가 매한가지일 것이다. 수도권 집중화로 인한 과잉 현상은 어디 의료뿐이겠는가. 존경해 마지않는 의사 장기려의 삶은 어김없이 인술과 사람이었다. 척박한 산업 고도화 사회를 살며 편익에 취해 사라져가는 건 어쩔 도리 없지만 지켜야 할 생명의 가치는 부둥켜안아야 함을 일깨운 삶이었다. 개인으로서 장기려 박사의 인술은 제한적이었다. 사람이 못하면 국가가 나서야 한다. 시민의 생명을 존중하는 것도 아픈 이들을 돌보는 것도 국가의 역할이지만 우리는 너무 오랜 기간 민간 부분에 그 역할을 위임해왔다. 지금의 의료대란이 그 방증이다. 그러다 보니 수도권과 지방으로 확연히 나뉜 대한민국의 현실 속에 의료도 공적 서비스의 가치는 흐릿해지고 점차 상품이 되었다. 그 책임이 온전히 의사 탓이던가. 정권교체기마다 부실하기 짝이 없는 의료개혁은 합리적 방안으로 나아가질 못했고 정부도 의사도 그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지 않은가. 의사 증원에 대한 옳고 그름의 찬반과는 별개로 의료개혁에 대한 내용적 논쟁이 부재되어 있는 작금의 현실은 심히 개탄스럽다. 무엇이 중요한 논쟁이 되어야 하는지 길을 잃어가고 있다. 결국 의대증원 2000명을 선포하고 나선 정부와 더더욱 적대적으로 돌아선 의사 집단 사이에서, 지방 소멸·고령화 시대에 봉착한 보건의료 구조를 재편하기 위한 혁신의 길은 미로가 되고 있다. 이번 증원으로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그곳에서 의사를 만나게 될까? 단정하기 어렵다. 정부가 의과대학별로 정원을 배정하기 전에 간과해선 안 될 현실이 있었다. 지역 의대에 정원을 주면 수련은 서울과 수도권 등에 있는 병원에서 한다. 대규모의 의대 입학 정원 확대만으로는 열악한 지역의료에 도움이 되긴커녕 오히려 서울에 있는 대형병원에 인력을 공급하는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는 가능성도 충분히 검토되었어야 했다. 지역 의대 졸업생이 지역에서 양질의 수련을 받은 뒤 머물 수 있는 인프라 확보가 없는 증원만으로 의료개혁이 가능할까. 지역의 필수 의료 문제를 책임지겠다는 대학만이 정원을 받아가는 가치 부여의 방식으로 의료개혁의 논의가 시작되어야 한다. 그러나 의료개혁의 배는 산으로 가고 있다. 단순히 지역 의대별로 수를 배분하는 현재의 정부안으로는 오히려 수도권 대형병원의 쏠림 현상과 모두가 염려하는 의료 시장주의를 가속화할 가능성이 크다. 누구나가 예외 없이 의지와 다르게 흘러가는 분열은 마음 곳곳에 상처를 남긴다. 욕을 듣더라도 의사로서의 사명감을 가진 좋은 의사가 되기 위해, 국민의 더 나은 의료접근성을 확장하기 위해 의정 간 대화는 멈추지 않아야 한다. 정부도 기득권이라는 프레임으로 의사들의 마음속 상처를 규정해서는 안 된다. 전공에 따른 의사 소득의 양극화도 성난 심정의 근간임을 이해해야 한다. 만고의 진리처럼 단순히 의대 정원만 늘린다고 필수·지역의료가 강화되긴 어렵다. ‘어떻게’가 더 중요하다. 지역사회와 공공의료에 대한 필수 교육과정과 지역 의대의 낙후된 강의실과 실습 장비를 확충하는 재정 지원의 세심한 설계가 먼저다. 대한민국에서 의정 간의 극한 대립은 이제 익숙한 풍경이 되었다. 의정 간의 사회적 갈등 비용은 속절없이 소비되었다. 덧난 상처에 새살은 돋지 않았다. 이제 무엇이 중요한지를 논의해야 한다. 의사 증원의 숫자에만 의사도 정부도 집착하지 않기를 소망해 본다. 안태환 의학박사·이비인후과 전문의

2024-03-28

[김원배의 시선]공시가격 현실화보다 중요한 것

A X B = C라는 간단한 곱셈 공식이 있다. 공시가격을 내는 방법이다. 시세(A)가 있고 여기에 현실화율(B)이라는 수치를 곱하면 공시가격(C)이 나온다. 그런데 현실화율이라는 수치가 들쭉날쭉하다. 2020년 국토교통부 자료를 보면 아파트 공시가격 현실화율이 40%대 중후반부터 85% 정도까지 다양하다. 그래서 이를 2035년까지 90%로 맞추겠다는 게 2020년 11월 문재인 정부가 발표한 공시가격 현실화 로드맵이다. 내용을 보면 공동주택(아파트)과 단독주택의 도달 시기가 다르다. 아파트 중에서도 고가 아파트가 2025년으로 제일 빠르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면서 현실화 로드맵을 재검토한다고 했다가, 급기야 최근 윤 대통령이 로드맵 폐기까지 언급했다. 들쭉날쭉한 비율 고르게 해야 인위적 차별 적용은 부당 증세 정확한 시세 산정이 기본이다 공정 과세 의지가 없다는 비판이 나오는 등 논란이 됐다. 주무 부처인 국토부는 연구 용역을 줬다며 올여름 이후에나 개편 방향을 알리겠다는 입장이다. ‘폐기’라는 단어로 궁금증만 키웠고 구체안이 나오려면 몇 달이나 남았다. 대통령과 주무 부처가 뭔가 역할 분담이 안 된 느낌이다. 주요 정책을 알리고 소통하는 방식은 개선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화 로드맵은 문제가 많다. 왜 그런가. 부동산 소유주는 매년 이때가 되면 공시가격(C)을 열람한다. 그런데 C의 부모 격인 A와 B는 알지 못한다. 정수연 제주대 경제학과 교수는 “현실화율은 공시가격의 오류를 덮는 베일”이라고 표현했다. A를 제대로 산정해 공개할 수 없으니 B라는 장치로 납세자의 눈을 가린다는 뜻이다. 일부에선 로드맵 폐기를 두고 ‘부자 감세’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현실화율이라는 불투명한 도구로 고가 아파트에 부당한 증세를 했거나, 그렇게 하려 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국토부에 따르면 2020년 시세 9억원 미만 아파트의 공시가격 현실화율은 68.1%, 15억원 이상은 75.3%였다. 격차는 7.2%포인트인데 로드맵에선 올해 14.2%포인트로 벌어지는 것으로 설계했다. 원래 차이가 있었는데 이를 인위적으로 확대했다. 현실화율이 높아지면 공시가격이 오르고 보유세 부담이 늘어난다. 이는 조세 법률주의에도 어긋난다. 세금은 법률로 정하며 기준이 명확해야 한다. 비싼 집에 세금을 더 부과하려면 세율을 높이는 등 투명한 기준에 따라야 한다. 당사자도 모르는 현실화율이라는 숫자를 차별적으로 적용해 세 부담을 높인 것을 어떻게 조세 정의라고 할 수 있는가. 이는 고가 아파트만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단독주택은 거래가 드문 비싼 집보다 거래가 많은 저가 단독주택의 현실화율이 높다고 알려져 있다. 개별 현실화율이 공개되지 않으니 누가 불이익을 받았는지 알 수도 없다. 2022년 한국지방세연구원이 펴낸 ‘부동산 세제 쟁점 분석 및 정책 제언’에선 로드맵을 평가하며 “보유세 부담의 강화 차원에서 고가 주택을 중심으로 공시가격 현실화가 추진됐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부동산 유형, 가격대 등에서 발생하는 현실화율 격차를 해소함으로써 국민 부담의 형평성을 높이는 노력을 우선할 필요가 있었다”고 덧붙였다. 따라서 이 로드맵을 그대로 이행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이냐가 관건이다. 일부 학자들은 시세를 공시가격으로 활용하자고 주장한다. 이렇게 되면 현실화율은 단번에 100%가 된다. 지난해 11월 국회 입법조사처가 낸 ‘주요국의 부동산 가격공시제도 운영현황 및 시사점’엔 미국 뉴욕시의 재산세 고지서가 나온다. 고지서엔 ‘추정 시장가치(estimated market value)’가 표시돼 있다. 한국에선 알려주지 않는 A에 해당한다. 그런데 국토부는 이렇게 하긴 어렵다고 한다. 현실화율 적용 이전의 산정가(시세)를 공시가격으로 발표했는데, 실거래가가 그 아래로 떨어지는 역전현상이 생기면 혼란이 온다는 이유에서다. 이러면 정부가 실제보다 높은 공시가격으로 과세한다는 불만이 나올 수밖에 없다. 공시가격은 보유세 납부와 여러 가지 제도의 기준이 된다. 공시가격이 제대로 나오려면 무엇보다 '시세'가 무엇인지 명확히 정의하고 공평하게 산정하는 게 기본이 돼야 한다. 그래야 현실화율도 형평성 있게 맞출 수 있다. 현실화율은 납세자의 수용성을 높이는 완충 장치로 써야지, 불투명한 시세를 가리는 ‘변명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언젠가 산정 시세도 공개해야 한다. 이의 신청과 민원이 늘어날 수도 있겠지만 이를 듣고 보완해야 장기적으로 더 정확한 시세와 신뢰받는 공시가격을 낼 수 있다. 김원배(onebye@joongang.co.kr)

2024-03-28

[시론] 드론 공격 취약한 후방에 민·관·군 협력 필요

역사를 돌아보면 첨단 과학기술이 전쟁의 흐름을 바꾼 경우가 많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처음 등장한 전차와 항공기는 제2차 세계대전의 향방을 좌우했다. 1991년 걸프전쟁에서는 토마호크 순항미사일, F-117 나이트호크 스텔스 폭격기 등이 위력을 과시했다. 이런 ‘스마트 전쟁’은 21세기 강대국들이 어떻게 싸울지를 생생하게 보여줬다. 2022년 2월 24일 러시아의 침공으로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은 드론과 무인 수상정 등 무인 무기가 전쟁의 새로운 ‘게임 체인저’로 등장해 새로운 전쟁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무인기의 엄청난 활약상을 눈여겨본 세력이 바로 북한이다. 북한은 장거리·정밀타격 드론을 대내외에 공개하면서 앞으로 드론을 투입해 대남 무력 도발에 나서겠다고 협박하고 있다. 공항·원전 등 북 무인기 공격 노출 후방은 방호 투자 후순위로 밀려 민·관·군 집단지성으로 해법 찾길 현대전은 국가 총력전이다. 적의 위협으로부터 국가 중요시설을 보호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실제로 러시아는 미사일과 자폭 무인기 등을 동원해 우크라이나의 에너지 시설을 집중적으로 공격하고 있다. 특히 군집화·스텔스화·초소형화하는 드론의 위협을 막아내려면 민·관·군이 집단지성을 발휘해야 한다. 이를 통해 통합방위 작전의 강점에 기반한 ‘대(對) 드론 통합 방어 체계’를 제시해야 한다. 정부는 지난 1월 중앙통합방위회의를 열고, 북한의 드론 위협에 대비해 국가 중요시설의 대 드론 통합 방호 체계 구축에 속도를 내고 있다. 군 당국도 ‘국방 혁신 4.0’을 통해 첨단화한 대 드론 체계 전력 도입에 힘쓰고 있다. 하지만 후방 지역은 전방과 비교하면 대 드론 체계에 대한 투자가 후순위로 밀리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후방은 공항·원전 등 국가 중요 시설이 산재해 있다. 이 때문에 북한이 드론 도발로 최대의 효과를 노릴 수 있는 타깃이 될 우려가 크다. 군 당국뿐만 아니라 중앙 정부, 지방자치단체, 대학과 민간 연구기관 등의 통합적인 노력이 절실한 이유다. 후방 지역은 대도시가 밀집해 있기 때문에 방호체계와 작전 수행 방법이 전방과는 달라야 한다. 후방 지역은 대 드론 체계 인프라 구축의 공간 및 재정적 효율성을 중시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도심 지역의 피해 최소화를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주요 지역을 묶어 방호하는 ‘권역화’의 관점으로 통합·운용해야 한다. 또한 시험·평가를 통해 지속해서 기술을 개발하고 성능을 개량하는 등 권역화된 대 드론 통합 방호체계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대 드론 통합 방호 체계의 실효성을 검증하면서 관련 체계의 연구·개발·생산 기반을 닦을 수 있게 된다.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 연관 산업을 집적화한다면 소멸 위기에 놓인 지방의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될 수 있다. 지난 2월 경북 구미시와 산업통상자원부, 육군 제2작전사령부, 경운대, LIG넥스원과 한화시스템이 ‘구미권역 국가 중요시설 대 드론 통합 방호 체계 시범지구 사업’ 업무 협약을 체결했다. 이는 국내 최초로 민·관·군이 협력해 국가 중요시설에 대 드론 통합 방호 체계를 만들려는 시범사업이다. 자폭 드론 등 고도화하는 북한 무인기와 비인가 불법 드론으로부터 국가 중요시설을 방호하는 것이 목적이다. 서울이나 수도권이 아닌 지방에서 먼저 시범사업을 시작한 것은 의미가 크다. 구미시에는 대규모 첨단산업단지가 집적해 있다. LIG넥스원과 한화시스템 등 대표적 방위산업 기업이 있고, 대 드론 방호연구소와 실증 능력을 갖춘 지역대학이 있다. 게다가 낙동강이라는 넓은 실증 공간 등 최적의 조건을 갖춘 곳이 구미다. 시범사업은 지역발전에 큰 활기를 불어넣을 것으로 기대된다. 앞으로 시범 사업이 성공하고 그 효과를 전국으로 넓히려면 핵심 기술과 인력이 제일 중요하다. 지역 인재들의 수도권 유출 방지와 지역 정주를 늘리기 위해서는 향후 대 드론 관련 특화연구센터와 상용화 지원센터를 지역에 설치할 것을 제안한다. 대 드론 통합 방호체계 표준화를 통해 지역 안보 및 연관 산업의 발전에 이바지하게 될 것이다. 우수한 기술력을 갖춘 지방대학의 인재를 지역 방위 산업체로 보내고, 지방에 정주하게 하는 것은 국가 균형발전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김동제 경운대 총장

2024-03-28

[백우진의 돈의 세계] 인구밀도와 출산율 ‘상관’일까 ‘인과’일까

빙과류 소비와 열사병 발생은 상관관계를 보인다. 빙과류 소비량이 연중 절정에 이르는 시기에 열사병 환자도 집중된다. 두 변수는 인과관계는 아니다. 즉, 빙과류를 많이들 먹어서 열사병이 많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인구밀도와 출산율은 어떤 사이인가. 두 변수가 인과관계라는 주장이 2020년에 처음 논문으로 발표된 이후 상당한 호응을 얻고 있다. 최근 나온 책 『초저출산은 왜 생겼을까』에도 담겼다. 둘은 인과관계는 아니다. ‘인과’를 주장하는 측은 인구밀도가 경쟁압력을 통해 출산율에 영향을 끼친다고 설명한다. 경쟁압력 상승은 1인당 주거·업무 공간 축소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관련 조사에서 “전보다 복닥대며 살고 일하기 때문에 결혼도 안 하고 아이도 안 낳는다”는 답변은 나온 적이 없다. 또 1인당 공간을 넓히고 그 결과 인구밀도가 높아지게 되는 선택이 가능하다. 용적률 상향을 통해 고밀도로 주거·상업지역을 개발하면 그렇게 된다. 이 경우 인과관계 주장의 기초인 ‘인구밀도와 함께 경쟁압력이 높아진다’가 무너진다. 셋째, 인구밀도는 집값을 통해 출산율에 영향을 준다. 인구밀도가 낮아져도 주거비용이 경감되지 않는다면 출산율이 오르지 않는다. 서울이 그런 사례를 보였다. 서울 인구밀도는 2017년 1만5000명대로 떨어졌고 계속 낮아졌다. 그러나 서울 출산율은 2017년 이후에도 매년 하락해 지난해 0.593명을 기록했다. 이렇다 보니 두 변수 간 상관관계도 느슨하다. 예컨대 파리는 인구밀도가 서울보다 높고 출산율도 높다. 따라서 수도권 인구밀도 저하를 통한 출산율 제고 대책은 실효성이 낮다. 수도권 인구밀도 저하 자체가 어렵거니와 그 효과가 집값 안정으로 이어진다는 보장도 없어서다. 그보다는 집값을 안정시키는 고밀도 서울 개발이 효과가 있으리라고 본다. 백우진 경제칼럼니스트·글쟁이㈜ 대표

2024-03-28

[글로벌 아이] 재외 교민들의 투표지에 담긴 소망

“우리나라가 정상적인 모습으로 회복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왔습니다.” 중국에 26년째 살고 있는 교민 박정수씨의 말이다. 네이멍구자치구 바오터우에 거주하는 그는 새벽부터 집을 나서 재외국민 투표소가 마련된 베이징 주중한국대사관을 찾았다. 바오터우는 베이징에서 600㎞ 넘게 떨어진 곳에 있다. 기차로 왕복 7시간, 투표 한 번에 꼬박 하루를 다 써야 하지만, 박씨는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예전 같지 않아 좋은 방향으로 바뀌었으면 좋겠다”며 먼 길을 마다치 않고 달려왔다. 다음 달 10일 열리는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 앞서 재외국민 투표가 시작됐다. 지난 27일부터 다음 달 1일까지 엿새 동안 전 세계 115개 나라 220개 투표소에서 진행된다. 이번 재외선거 투표에 등록된 사람은 14만8000명 정도다. 지난 21대 국회의원 선거보다 14% 가까이 줄었다. 특히 중국에는 재외선거권자가 17만여 명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투표를 위해 신고한 사람은 10% 정도에 그쳤다. 교민의 투표 편의를 위해 주중 대사관 측이 마련한 버스는 베이징과 톈진 곳곳을 돌고 투표소에 도착했지만 45개 좌석은 상당수 비어 있었다. 투표소를 찾는 발걸음이 줄어든 건 중국의 ‘제로 코로나’ 3년을 거치면서 전체적인 교민 수가 크게 줄어든 영향이 크다. 하지만, 계속 악화하는 한·중 관계와 정치권에 대한 불신에서 원인을 찾는 목소리도 있다. 베이징에서 근무 중인 한 주재원은 “낮은 투표율 자체가 의사 표시”라면서 “투표를 하지 않음으로 나의 뜻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투표소를 찾은 유권자들은 희망을 그리고 있다. 중국에 유학 중인 대학생 오혜연 씨는 “지난 대선에 이어 두 번째 재외국민 투표”라면서 “투표를 하면서 우리나라와 내 지역에 대한 책임감이 더 올라간 것 같다”고 소감을 밝혔다. 버스로 3시간 30분 만에 투표소에 도착한 중국 교민 박인헌 씨도 “국민 한 사람으로 투표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톈진에 20년 넘게 산 김 모 씨는 “중국인들의 한국인에 대한 시선이 사드(THAAD) 사태 때보다 더 안 좋아졌다고 느낀다”며 “앞으로 나아졌으면 한다”며 투표했다. 최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이른바 ‘셰셰’ 발언을 두고 정치권에서는 공방이 오간다. 대중 외교의 큰 틀을 논하면서도 ‘국민의 삶’은 빠져 있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투표용지에 담아 전하는 마음은 과연 어디까지 닿을 수 있을 것인가. 이도성(lee.dosung@joongang.co.kr)

2024-03-28

[권석천의 컷 cut] 때로는 흑백이 본질을 드러낸다

가끔 영화관에 가기 전 관람평을 읽는다. 한 줄짜리여서 줄거리에 노출될 염려도 적고, 어느 정도 느낌도 짐작할 수 있다. 영화 ‘오키쿠와 세계’ 관람평에서 눈길을 끈 한 줄이 있었다. ‘아. 흑백이라 다행 ㅎㅎ’ 대체 무엇이 다행일까. 그 뜻을 실감한 것은 영화가 시작되면서였다. 영화의 배경은 메이지 유신 직전의 일본이다. 1850년대 후반 에도(현 도쿄)에 살던 도시 하층민들의 삶이 펼쳐진다. 주인공은 몰락한 무사 집안의 딸 오키쿠와 똥거름 장수를 하는 두 청년, 야스케와 츄지다. 영화의 첫 장 제목부터 심상치 않다. ‘에도의 응코(똥)는 어디로?’다. (※약간의 스포 있음) 적나라한 장면 장면을 견딜 수 있게 해준 건 흑백 영상이었다. 색깔을 빼니 신기하게도 냄새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흑백은 사람과 사람의 마음에 집중할 수 있게 해줬다. 특히, 끔찍한 사건으로 목소리를 잃은 오키쿠가 츄지를 찾아가 연정을 고백하는 장면에서다. 오키쿠의 손짓과 몸짓에 츄지도 발성이란 표현수단을 내려놓고 눈빛과 손짓, 몸짓으로 마음을 털어놓는다. 어떻게든 마음을 보여주려 필사적인 그들의 손짓과 몸짓을 더 도드라지게 한 건 흑백의 영상이었다. 화려한 색색의 겉 포장을 벗기고 나니 가려져 있던 골간(骨幹·핵심 부분)이 드러난다. 저녁 무렵 후미진 골목 안에서 서로 무릎 꿇고 무언의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 어깨 위로 하얀 눈이 쌓인다. 우린 흑백을 부정적으로 여길 때가 많다. 컬러가 다양성을 의미한다면 흑백은 이분법적이고 단선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흑백논리’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흑백이 마냥 나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시선은 색감을 따라가다 본질을 놓치고, 착각과 오류에 빠지곤 한다. 때로는 흑백의 프리즘으로 진실을 보아야 하는 순간도 있다. 그것이 영화관 안이든, 밖이든. 권석천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

2024-03-28

[박한슬의 숫자읽기] 착한 전기요금은 없다

전기요금 인상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결국 올해 2분기 전기요금이 동결됐다. 표면적으로 내세운 이유는 ‘물가’다. 물가상승률을 낮추기 위해서는 공공요금 인상을 최대한 억누르는 조치가 필요하다는 논리다. 그런데 이 말은 사실 핑계다. 이미 작년 5월 국내 물가 관리기관 중 하나인 한국은행의 이창용 총재가 밝혔듯, 전기요금 인상은 물가안정 정책과 상충하지 않는다. 한국전력이 적자를 메우려 발행하는 막대한 규모의 한전채가 되레 물가 인상 요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전기요금 동결의 까닭은 보름 남짓 남은 총선뿐이다. 매표(買票) 행위를 하는 거다. 물론 전기요금은 ‘물가안정법’의 적용을 받는 공공요금이다. 한국전력 같은 공기업에만 독점을 허용하는 것도, 실질적으로 요금결정권을 정부가 갖는 것도 공공재적 성격이 짙은 전기에 대한 국민들의 접근성을 보장해주기 위해서다. 그뿐인가? 전기는 각종 산업의 필수적인 생산요소로 기능하고 있고, OECD 평균보다 낮은 전기요금을 유지하는 덕분에 우리 기업들은 해외에서 산업경쟁력을 갖출 수 있게 됐다. 그러니 공공서비스 요금을 원자잿값 변동에 따라 과도하게 인상하는 건 그것대로 부작용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한전이 지금처럼 과도한 적자를 보는 상황이 오래 지속되다 보면 장기적으로는 전력공급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게 문제다. 전력공급이 불안정해진다고 하면 발전(發電)만 떠올리는 사람이 많겠으나, 실은 그만큼 중요한 게 바로 송전(送電)이다. 우리나라는 전력의 생산과 소비가 지역적으로 매우 이격이 커, 발전 시설이 아무리 늘어도 송전망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으면 전력공급이 불가능해서다. 예컨대 2022년 기준 지역별 전력자급률 자료를 보면, 서울이 쓰는 전력량 중 오직 8.9%만이 서울 내에서 생산된 전기다. 나머지 91.1%는 원전을 여럿 갖춘 부산·경남이나 대규모 화력발전소를 가진 충남 같은 곳에서 생산된 전력을 끌어다 충당하는 구조다. 그러니 제대로 된 송전망을 갖추지 못하면 수도권에 집중된 첨단 산업시설의 적절한 가동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의미다. 장래엔 송전망이 부족해질 수 있다는 식의 전망이 아니다. 이미 동해안 지역은 발전 용량이 송전 가능한 최대 용량을 초과해, 발전량을 제약하고 있는 상태다. 그래서 추가적인 송전망 구축이 필요한 상황이지만, 그런 송전시설 투자를 계획하고 집행하는 곳이 한국전력이다. 이미 200조원의 부채를 짊어져, 하루에 이자만 121억원씩 내야 하는 곳에 그럴 여력이 있을까. 표심이 무서워 전기요금 인상을 주저하다, 데이터센터나 전기차 같은 추가 전력수요를 외면하는 건 장기적 산업경쟁력을 깎아먹는 일이다. 그런데 대체 언제까지 이런 매표 행위를 ‘착한 적자’라 부를 생각일까. 박한슬 약사·작가

2024-03-28

[문병주의 뉴스터치] 중국 유통 공룡의 약탈가격 정책

국내 최대 유통업체인 이마트가 창사 이래 처음으로 희망퇴직을 실시 중이다. 인터넷 쇼핑몰 11번가도 지난해 말에 이어 최근 또 희망퇴직을 공고했다. 소비 트렌드에 대응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저렴한 가격으로 무장한 알리익스프레스, 테무와 같은 중국 유통 공룡들에게 속수무책 밀리고 있는 것도 주요 이유다. 대기업뿐 아니다. 중소기업중앙회가 제조업 및 도ㆍ소매업종 중소기업 320개사를 대상으로 조사해보니 32.9%는 중국 e커머스가 매출 감소에 영향을 미쳤다고 응답했다. 47.8%는 향후 매출 감소를 예상했다. 소비자 입장은 좀 다르다. 가격이 저렴하고, 가성비가 좋다는 이유로 찾는다. 이 점을 이용해 알리, 테무는 ‘약탈가격 정책’을 펴고 있다. 손해를 감수하면서 낮은 제품 및 서비스 가격을 무기로 경쟁사를 밀어내는 전략이다. 알리와 테무는 현재 국내 온라인 판매 2위, 4위다. 곧 순위가 더 올라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이들이 선전하듯 '쇼핑 재미'에 빠진 소비자들 사이에서 ‘알리 지옥’ ‘테무 지옥’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겼다. 정부가 해외 직구 대책반을 꾸려 실태조사에 나섰고, 제품 불량에 대한 소비자 불만을 개선하겠다고 한다. 관세정책을 바꿔야 한다는 얘기도 나오지만 일방적으로 추진할 수 없어 당장 뾰족한 수가 없다. 각종 규제를 통해 국내 유통 기업들의 성장을 막았던 정책의 부작용이란 분석도 있다. 약탈가격 정책이 소비자로서는 즐거운 일 같지만, 경쟁자가 소멸한 후에는 살아남은 기업이 공급과 가격을 맘대로 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셰셰”하며 당장의 중국발 싼 가격을 반길 일만은 아니다. 문병주(moon.byungjoo@joongang.co.kr)

2024-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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