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법, 연금개혁은 물론 민생까지…尹·李 사안마다 ‘줄줄이 평행선’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회담에선 정치권의 거의 모든 쟁점이 언급됐다. 그러나 각자의 의견 개진 이상은 없었다. 29일 회담은 이 대표가 14분 40초간 공개 발언을 통해 민주당의 입장을 밝히고, 이어진 비공개 회담 때 윤 대통령이 주로 답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양측이 명분으로 내걸었던 민생 이슈부터 엇나갔다. 이 대표는 모두발언에서 민주당의 총선 공약이었던 1인당 25만원의 긴급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재차 요구했다. 약 13조원이 소요되는 만큼 정부의 추가경정예산안 편성을 요구하는 취지였다. 윤 대통령은 일축했다. “물가와 금리, 재정 상황 등 경제 전반에 미치는 영향을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어려운 분들을 더 효과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논리였다. 대통령실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이어 소상공인 지원, 서민금융 확대 정책을 거론하며 “정부 정책을 먼저 시행하고, 필요할 경우 야당이 제기하는 부분을 여야가 협의하며 논의하자”고 말했다. 민주당의 브리핑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국가 재정이나 인플레이션이 우려되기 때문에 제가 단칼에 잘랐다, 선을 그었다”고 말했다. 연구·개발(R&D) 예산 복원 시점에 대해서도 입장이 달랐다. 이 대표가 “내년까지 미룰 게 아니라 추경이 있다면 한꺼번에 처리하면 좋겠다”고 밝힌 데 대해, 윤 대통령은 “R&D 자금은 국가 경쟁력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며 정부의 R&D 정책 방향을 설명하는 데 주력했다. 민주당은 “윤 대통령이 추경을 통해 R&D 예산을 복원하거나 증액할 생각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진성준 정책위의장)는 입장이다. 여·야·정 민생 협의체 구성과 관련해서 대통령실 관계자는 “대통령은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이었다”고 전했다. 민주당 측은 “(민생 정책은) 대통령이 결단을 내리면 되는 일인데, 협의체에 사안을 넘기면 책임을 떠넘기는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연금 개혁의 방향과 결정 주체에 대한 생각도 엇갈렸다. 이 대표는 최근 국회 연금개혁특위 공론화위원회가 제시한 이른바 ‘더 내고 더 받는 안’(소득대체율 50%, 보험료 13%)을 언급하며 “대통령께서 정부·여당이 개혁안 처리에 나서도록 독려해달라”고 말했다. 이에 윤 대통령은 “정부가 이미 국회에서 결정을 내릴 수 있을 만큼 충분하고 많은 데이터를 제출했다”고 답했다. 야권이 추진 중인 이태원 참사 특별법과 채 상병 특검법을 둘러싼 시각차는 더욱 확연했다. 이 대표는 모두 발언에서 “국민 159명이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갔던 이태원 참사와 채 해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것은 국가의 가장 큰 책임”이라며 법 통과를 요구했다. 이후 비공개 회담에선 채 상병 특검법은 거론되지 않고, 이태원 참사 특별법만 논의됐다고 한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대통령은 사건 조사, 재 방지책, 피해자 유족 지원에 대해 공감한다고 했다”며 “다만 민간조사위에서 영장 청구권을 갖는 것은 법리적 문제가 있어 해소하고 논의하면 좋겠다는 취지로 말했다”고 설명했다. 민주당 측 설명은 대통령실 브리핑과 달랐다. 박성준 수석대변인은 “이 대표가 ‘유가족의 한을 풀어줘야 한다’고 하자, 윤 대통령은 ‘독소 조항이 있다, 이 법안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했다”며 “사실상 이태원 특별법을 윤 대통령이 거부했다”고 말했다. 방송 관련 입장은 180도 가까이 달랐다. 이 대표는 모두 발언에서 “정부 비판적 방송에 대한 중징계가 이어지고, 기자·언론사 압수 수색이 일상적”이라며 “우리 국민도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잡혀가는 것 아니냐는 걱정을 하는 세상이 됐다”고 말했다 "스웨덴 연구기관이 독재화가 진행 중이라는 연구결과를 발표한다”는 말도 했다. 이에 대해 윤 대통령은 비공개 회담에서 “(언론사 징계) 이런 내용은 보고받지 않는다”는 취지로 답했다고 한다. 박 수석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가짜 뉴스, 허위 조작이 국가 업무방해 행위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서 수사가 이뤄진 것 아니냐는 취지로 말했다”고 전했다. 이 대표는 이날 김건희 여사를 둘러싼 의혹을 직접 거론하지 않으면서도 “국정 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면 좋겠다”고 에둘러 언급했다. 이 대표는 윤석열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에 대해서도 유감 표명과 ‘향후 국회 결정을 존중하겠다’는 약속을 요구했다. 이에 윤 대통령은 말없이 듣기만 했고, 이후 비공개 회담에선 관련한 언급이 없었다고 한다. 이날 내내 평행선을 달린 윤 대통령과 이 대표가 그나마 공감대를 형성한 사안은 의료 개혁의 필요성이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이 대표는 의료 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했다”며 “이 대표는 ‘의료 개혁이 시급한 과제고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박성준 대변인도 “어느 정도 의료 개혁 필요성을 공감하는 얘기는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이 역시 구체적인 방법론에 대한 대화는 제대로 오가지 못했다. 오현석.손국희.왕준열.황수빈(oh.hyunseok1@joongang.co.kr)